중고나라에 판매글 올렸다가 업자로 오해받아 정지먹은 이야기
이야기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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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나라에서 업자로 의심받아 정지 먹은 사람.jpg | 유머 게시판 | 루리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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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고나라에 특이한 판매글을 올렸다가 업자로 오해받아 영구정지를 먹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해당 사실이 인터넷 커뮤니티 곳곳으로 퍼져나간 탓에 예상밖의 많은 관심을 받게 되어 후기도 작성하고 이미지 제작 방법도 소개할 겸 글을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덧붙여 "현업인이다." 라던가 "전공자다." 라는 추측을 많이들 해주셨는데 저는 현재 22살 대학생이고 컴퓨터를 전공하며 취미로 디자인과 사진을 만지고 있습니다.
폰이 팔리지가 않아서.
손꼽아 기다리던 아이폰12 프로를 사게 되며 기존에 사용하던 아이폰11을 중고로 팔게 되었습니다. 사실 아이폰11을 살 때부터 1년만 쓰고 중고로 팔 생각으로 애지중지 아끼며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달 아이폰12 프로를 사전예약으로 구매하게 되어 기존에 사용하던 아이폰11을 장터에 내놓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주일이 지나도 연락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러면 가격을 내려야 하는데, 낮은 가격에 판매하기는 싫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돈을 좋아하니까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적당한 가격에 빨리 팔릴 수 있는지 고민한 끝에 디자인과 사진이라는 취미를 살려 실제 광고처럼 판매용 이미지를 만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잘 찍은 사진에 그럴싸한 편집이 들어간다면 효과적으로 간절함과 정성을 표하면서 사람들의 클릭을 유도하여 빠른 판매가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이미지를 만들어 봅시다.
우선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꺼냈습니다. 당시 제 책상 상황을 재현한 사진입니다. 시간은 5시 반 정도 되어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방 창문이 큰 덕분에 자연광만으로도 광량이 어느정도 확보되었지만 제품 사진을 제대로 찍기 위해서라면 조명을 꺼내는 것이 맞습니다. 마침 고독스 지속광이 있어 꺼내볼까 싶었지만, 배도 고프고 과제도 막 끝낸 참이라 힘이 없어 자연광과 모니터, 노트북에서 나오는 불빛만을 이용해 사진을 찍기로 합니다.
사용한 카메라는 가볍게 일상용 서브 카메라로 사용하고 있는 후지 X-E3, 렌즈는 35mm(풀프레임 환산 50mm) F2입니다. 사진은 과거에 찍어둔거라 1855 렌즈가 나와있는데 지금은 처분했습니다.
세팅은 ISO 3200에 F4, 노출은 +1/3스탑 정도로 맞췄습니다. 제대로 찍기 위해서는 조명을 꺼내 광량을 확보해 ISO를 낮추고 조리개도 더 조이면 좋았겠지만 중고장터 올리는 용도로 그렇게까지 필요하진 않으니 적당히 하기로 합니다.
이어서 애플 홈페이지를 보고 애플이 어떤 식으로 글과 사진을 배치했는지 파악합니다. 제일 위에 볼드체로 'iPhone 12 Pro' 라고 적혀있고 아래에는 큰 글씨로 메인 카피인 '도약의 시간.'이 적혀있습니다. 그 아래에는 보다 상세한 제품 정보가 '3개' 들어있고 그 아래에는 제품 사진이 있습니다.
폰트는 애플이 언제나 사용하는것처럼 한글은 애플SD고딕, 숫자와 영문은 SF Pro입니다. 저는 맥 사용자라서 기본으로 있는 폰트인데 윈도우 사용자는 따로 구하는 방법을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애플이 어떤 식으로 글과 사진을 배치했는지 파악했으니 이제 따라할 차례입니다. 우선 사진 비율은 1:1 정방형으로 정했습니다. 모바일 접속자가 많은 곳에서는 세로로 긴 이미지가, PC 접속자가 많은 곳에서는 가로로 긴 이미지가 좋지만 중고장터의 사용자 비율이 어떠한지 알 수 없으니 양쪽에서 모두 무난한 1:1 정방형을 택했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저의 개인적인 판단이지 정답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3등분할에 따라 배치했습니다. 아래의 2/3 영역에 폰과 박스 사진이 들어가고 위의 1/3 영역에 메인 카피가 들어갈 예정입니다. 또한 배경의 위, 아래 박스는 평행으로 놓여있어 안정감을 주는데 그 위에 놓인 폰은 박스가 만드는 평행 선을 가로질러 배경과 분리된 느낌을 줍니다. 마지막으로 폰과 사과 로고가 중앙에 맞추어 정렬되도록 하여 구도를 완성했습니다.
이어 카피를 작성해줍니다. 애플은 'iPhone 12 Pro' 글씨를 작게 하고 '도약의 시간.'이라는 카피를 강조했지만 저는 반대로 가기로 했습니다. 'iPhone 11'를 큰 글씨로 강조했습니다.
'iPhone 11'은 표기를 잘 지켜야 합니다. i는 소문자, P는 대문자이고 iPhone과 11은 붙여쓰지 않고 한 칸 띄어줍니다. 또한 애플은 '아이폰'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iPhone' 이라고 제대로 써줍시다.
메인 카피 '순백의 마법'은 애플이 써온 카피들을 보며 그럴싸하게 따라한 결과입니다. 아이폰SE2 소개 페이지에서 순백이라는 카피를 본 적이 있기도 하고, 아이폰11 화이트의 백색은 애플이 추구하는 '순백색'을 잘 나타내고 있기에 이를 강조하고 싶었습니다. 또한 애플은 마법이라는 단어를 좋아했던것 같은데 이건 그냥 저의 느낌입니다.
아이폰 10년 사용자의 감성을 담아 적당한 메인 카피를 작성했으니 이제 중고 거래에 있어 중요한 정보인 가격을 함께 기입해줍니다.
마지막으로 애플이 쓸법한 적당한 문장을 지어내줍니다. 여기서 3의 법칙이 들어갑니다. 잡스는 첫 아이폰을 발표할 때 '터치 조작이 가능한 커다란 화면의 아이팟', '혁신적인 휴대전화', '획기적인 인터넷 통신기기' 라는 3개의 제품을 소개하는 척을 한 뒤 '사실은 하나의 제품이였다.' 라는 반전으로 연출을 극적이게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3은 많아서 질리지도, 적어서 단순해보이지도 않는 숫자로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시켜 사람의 이목을 끌어야 하는 순간에 유용하게 작용합니다. 이 법칙에 따라 '카메라'와 '프로세서', '순백색 바디' 라는 3개의 장점을 강조해줍니다. 마지막으로 애플이 쓸법한 그럴싸한 문구 "당신이 찾던 iPhone이 바로 여기에."를 지어내줍니다.
마지막으로 최종 색보정을 통해 이미지를 완성해줍니다. 이제 판매를 위한 준비가 끝났으니 중고장터에 올려줍니다.
당근마켓, 클리앙 중고장터, 에브리타임 중고장터, 개인 SNS 그리고 대망의 중고나라에 올렸습니다. 이제 곧 연락이 올 것입니다.
중고나라로부터 정지를 먹었습니다.
중고나라로부터 업자로 오해받아 영구정지를 먹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지만 제가 운영자라도 오해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이 사실을 개인 SNS에 올렸더니 그걸 누군가가 개드립으로 퍼갔습니다. 개드립에 한 번 올라간 사진은 쉴 새 없이 인터넷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웃대에도 올라갔고 루리웹에도 올라갔고 인스티즈, 더쿠까지 올라간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 퍼지는지 궁금해서 구글에 검색해보니 끝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우선 중고나라에는 문의 사이트를 통해 "업자가 아니니 정지를 풀어달라."는 문의를 넣어두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 다음날 오후가 되어 정지를 풀 수 있었습니다.
중고나라에서 사과문이 왔습니다.
이렇게 일이 사그라드나 싶었던 이틀차, 중고나라 마케팅팀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손수 만든 사과문 이미지와 함께 죄송하다는 메일, 그리고 기념품을 전달받을 링크를 보내주셨네요.
저는 폰도 팔았고 인터넷에서 재미도 보았고 정지도 풀렸기 때문에 "앞으로도 더 나은 중고나라가 되어달라."는 답장과 함께 주소지를 입력했습니다. 그랬더니 주소지를 입력하자마자 1시간 만에 퀵으로 기념품이 왔습니다.
마케팅팀 담당자분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미지도 만들고 기념품도 보내고,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필 저는 본가에 내려가기 위해 KTX에 막 타고 있었던 시간이라 이틀이 지나고서야 물건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일요일에 본가에서 돌아와 물건을 열어보았습니다. 재치있는 사과문과 함께 텀블러, 노트북 슬리브 등이 들어있었습니다. 그저 물건이 안팔려서 조금 장난을 쳐봤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관심과 기념품으로 돌아오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많은 관심을 주신 네티즌 분들과 기념품까지 챙겨주신 중고나라 운영자 분들까지 다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P.S.
노트북 슬리브가 13인치 용이라 16인치 맥북을 넣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판매를...
농담이고 주변 사람에게 선물할 계획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